공주, 감리교회의 첫 발걸음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김효미 기자 | 충청남도 공주시에 위치한 공주제일교회는 일제강점기 시절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으로 설립된 역사 깊은 교회다. 공주제일교회는 수원이남 지역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감리교회로, 1892년 미감리회는 서울 이남 지역을 수원과 공주로 나누어 선교 거점으로 삼고자 했다.
이를 위해 1893년 전도인 유치겸이 공주에 두 차례 파견되었고, 1896년에는 스크랜톤(W. B. Scranton) 선교사가 공주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899년, 스웨러(W. C. Swearer) 선교사가 공주지역 선교 내용을 보고하면서 본격적인 교회 설립의 발판을 마련했다.
공주제일교회의 개척과 초기 활동
1902년, 스웨러 선교사는 김동현 전도사를 파송하여 공주제일교회의 기틀을 마련했다. 김 전도사는 공주 관찰부(현 반죽동) 앞에 집을 구입해 전도 활동을 시작하며 공주제일교회를 개척했다.
1903년, 원산에서 활동하던 의료 선교사 맥길(William. B. Mcgill)과 이용주 전도사가 공주에 와서 하리동(현 옥룡동)에 초가 두 채를 구입해 예배당과 진료소, 교육시설로 활용하며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펼쳤다. 초기 교인으로는 김상문, 유월나, 베리백가, 백정운 부부 등이 있었다.
공주의 근대화와 선교 활동
공주제일교회의 선교사업은 1904년 샤프(Robert Arther Sharp) 선교사 부부가 공주에 오면서 더욱 활성화되었다. 샤프 선교사는 윤성렬을 교사로 임명해 명선학당(영명남학교)을 설립했고, 그의 아내인 샤프 여사는 허조셉 전도부인을 교사로 두어 명선여학당(영명여학교)을 설립해 여성 교육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샤프 선교사는 순회전도여행 중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사망했으며, 이후 1906년 선교사 우리암(William Earl Cranton Williams)이 공주에 와서 영명학교(현재의 영명고등학교 전신)를 설립해 인재를 양성했다. 샤프 여사는 유관순 열사를 수양딸로 삼아 영명학교에 입학시키고 3·1만세운동을 지원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다.
충청지역 3.1운동의 진원지, 공주제일교회
공주제일교회는 3·1운동의 중요한 거점으로서, 샤프 여사와 여러 선교사들이 주도한 교육과 전도 활동은 지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06년 이후 스웨러 선교사 부부를 비롯해 윌리엄즈(William Earl Cranton Williams) 선교사 부부, 케이블(C. Taylor) 선교사 부부, 번스커스(James Dale Van Buskirk) 의료 선교사 부부 등이 공주에 주재하며 전도, 교육, 의료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이로 인해 공주는 충청도의 선교 거점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공주제일교회
공주제일교회의 예배당은 1931년에 지상 2층의 붉은 벽돌로 건립되었으며, 근대 종교 건축물로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이 건물은 태평양 전쟁 기간인 1941년 일제에 의해 적산으로 분류되어 한동안 교회 출입이 통제되기도 했다.
6·25전쟁 중에는 예배당이 폭격으로 일부 파손되었으나, 교인들의 노력으로 1956년에 복원되어 오늘날까지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교회 전면에 설치된 스테인드글라스는 우리나라 스테인드글라스의 개척자인 이남규의 초기 작품으로,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앙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성부 창조주 하나님은 빛으로, 성자는 종려나무로, 성령은 비둘기와 빨간 성령의 불로 상징화되어 있다.
유일한 근대문화유산 교회
공주제일교회는 2011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근대 종교 건축물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근대 개신교 건물이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경우는 드물며, 공주제일교회는 처음부터 교회로 건축되어 보존된 유일한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현재 공주제일교회는 여수 애향교회, 목포 중앙교회와 함께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애향교회는 울진 읍성의 병영 건물을 해체해 재조립한 기와형태의 건물이며, 중앙교회는 일본 진종 대곡파 불교 사찰을 해방 이후 교회로 전용한 건물이다. 공주제일교회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근대화와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