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주언 기자 | 고종 황제가 맥클레이 선교사의 제안을 수락한 1884년의 결정은 단순한 병원과 학교 설립 허가가 아니었다. 국운이 기울어가던 상황에서 고종은 서구 문물을 도입해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려는 치열한 고민 속에 있었다. 미국 보빙사절단의 부사였던 홍영식의 보고와 일본에서 활동 중이던 맥클레이 선교사의 제안이 맞물리면서, 고종은 교육과 의료 개방을 선도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맥클레이와 김옥균, 고종을 움직인 그날
맥클레이 선교사는 1884년 6월 조선을 방문하여 김옥균과 접촉, 병원과 학교 설립을 제안하는 서신을 남겼다. 이후 7월 2일 밤, 고종은 이를 신중히 검토한 후 허가 결정을 내렸고, 다음 날 김옥균을 통해 맥클레이에게 이 사실이 전달되었다. 하지만 고종과 맥클레이가 직접 대면한 적이 없고, 제안서는 김옥균의 빈 집에 남겨졌다는 점에서 이는 당시 외교 및 정책적 고려 속에서 이루어진 결정임을 알 수 있다.
보빙사절단의 미국 방문과 그 영향
조선은 1883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외교 관계 강화를 위해 미국에 보빙사절단을 파견했다. 사절단은 미국 가우처 목사와 만나 조선의 사정을 알렸고, 가우처는 매클레이 선교사에게 조선 선교 가능성을 타진해 보라는 요청을 했다. 이는 단순한 선교 요청이 아닌 조선의 근대화와 국제 외교 강화 의지가 담긴 움직임이었다.
시대적 요구에 따른 부국강병 프로젝트
19세기 말 조선은 정치적 불안과 국제 정세의 혼란 속에서 부국강병의 길을 모색해야 했다. 특히,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고종은 서구 문물 수용과 개방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통리기무아문 설립을 통해 국정 개혁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병원과 학교 설립을 통한 근대화 추진이 중요한 국가 정책으로 자리 잡았다.
감리교 선교의 시작, 어디서부터 봐야 하나?
한국 감리교의 시작 시점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존재한다. 1885년 아펜젤러 선교사의 입국을 시작으로 볼 것인지, 1884년 맥클레이의 제안이 허락된 시점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다만, 중요한 것은 고종의 결단이 조선의 근대화와 국가 부흥을 위한 주체적 계획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를 통해 한국 교회와 현대적 교육, 의료 체계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2024년, 한국 감리교 선교 140주년을 기념하며 그 시작을 둘러싼 역사적 논쟁을 되돌아보는 것은 단순한 기념을 넘어 우리의 정체성과 역사를 확립하는 과정이다. 고종의 결단과 당시 시대적 요구를 재조명하며, 한국 교회의 영성이 다시금 부흥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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