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류승우 기자 |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아멘. 휫 필드는 18세기 존 웨슬리와 함께 영국 감리교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사람이다. 그가 낙심할 때마다 영적 도움과 충고를 제공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헌팅턴 여사이다. 어느 날 휫 필드가 헌팅턴 여사를 찾아와서 탄식하며 호소했다. “저는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그러자 헌팅턴 여사가 휫 필드에게 충고했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감사드리세요.” 휫 필드가, “왜 그런 감사를 드려야 합니까?” 하고 되묻자 여사가 대답했다. “우리 주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이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면 바로 당신을 위해 주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들은 휫필드라는 분은 용기와 힘을 얻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다음과 같은 복음의 4가지 요소들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간과 나를 창조하셨기에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인간의 역사와 나의 주인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주언 기자 | 조선의 부국강병을 꿈꾸며 고종은 미국을 통한 개화를 선택했다. 1884년 7월 2일, 고종은 미국의 선교사 매클레이가 제안한 병원과 학교 설립을 허가하고, 미국 상선의 조선 해상 운항과 통신망 설치를 결정했다. 그 결단은 조선의 개화와 독립을 위한 출발점이 되었으며, 이는 이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등의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의료 및 교육사업을 펼치는 계기가 되었다. 보빙사절단의 귀국과 미국 개혁 제안 미국을 방문한 보빙사절단은 1884년 귀국 후 고종에게 복명을 진행했다. 사절단의 부단장 홍영식은 기계 제조, 교통, 통신 등의 현대적 제도를 도입할 필요성을 역설하며 미국의 교육 방법을 본받아 인재 양성을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와 함께 미국 선교사 가우처와의 만남에서 매클레이 선교사를 통해 조선 선교 및 교육, 의료 사업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고종의 결단, 조선 부국강병 프로젝트 채택 고종은 보빙사절단의 보고와 매클레이의 제안을 수용, 1884년 7월 2일을 기점으로 조선의 개혁을 위한 종합 프로젝트를 채택했다. 이는 미국 상선의 항해 허가, 병원 및 학교 설립, 통신 시설 설치 등으로 이루어졌다. 이 프로젝트는 조선이 서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주언 기자 | 조선이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기 위한 개화의 길을 본격적으로 모색했다. 1883년 고종은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서구의 선진 문물을 배워 조선의 부국강병을 실현하고자 보빙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 사절단은 미국 곳곳을 탐방하며 새로운 국가 모델을 찾는 데 심혈을 기울였고, 이 과정에서 조선 선교의 계기를 마련하는 등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했다. 고종의 결단, 보빙 사절단 파견 배경 조선의 개화와 자강을 위해 고종은 보빙 사절단을 미국에 파견했다. 이는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서구 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고종의 전략적 결단이었다. 당시 조선은 국제정세의 급변 속에서 자국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개화 정책을 추진해야 할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미국으로 떠난 보빙 사절단, 선진 문물 탐방 시작 보빙 사절단은 1883년 9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뒤 뉴욕까지 대륙횡단을 하며 미국의 다양한 산업시설, 교육기관, 군사시설 등을 견학했다. 이들은 매일 밤 서로의 견문을 토론하고 서구의 문화를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 고종의 국서를 아서 대통령에게 전달하며 조선의 독립적 위상을 강화하고 개화 의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주언 기자 | 고종 황제가 맥클레이 선교사의 제안을 수락한 1884년의 결정은 단순한 병원과 학교 설립 허가가 아니었다. 국운이 기울어가던 상황에서 고종은 서구 문물을 도입해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려는 치열한 고민 속에 있었다. 미국 보빙사절단의 부사였던 홍영식의 보고와 일본에서 활동 중이던 맥클레이 선교사의 제안이 맞물리면서, 고종은 교육과 의료 개방을 선도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맥클레이와 김옥균, 고종을 움직인 그날 맥클레이 선교사는 1884년 6월 조선을 방문하여 김옥균과 접촉, 병원과 학교 설립을 제안하는 서신을 남겼다. 이후 7월 2일 밤, 고종은 이를 신중히 검토한 후 허가 결정을 내렸고, 다음 날 김옥균을 통해 맥클레이에게 이 사실이 전달되었다. 하지만 고종과 맥클레이가 직접 대면한 적이 없고, 제안서는 김옥균의 빈 집에 남겨졌다는 점에서 이는 당시 외교 및 정책적 고려 속에서 이루어진 결정임을 알 수 있다. 보빙사절단의 미국 방문과 그 영향 조선은 1883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외교 관계 강화를 위해 미국에 보빙사절단을 파견했다. 사절단은 미국 가우처 목사와 만나 조선의 사정을 알렸고, 가우처는 매클레이 선교사에게 조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김효미 기자 | 연세중앙교회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 근현대사 사진전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과 그 날들’은 구한말부터 현대까지 700여 장의 사진을 통해 대한민국 복음화의 역사와 선교사들의 헌신을 조명한다. 이번 전시는 약 100년 동안의 복음 전파의 순간들을 담아내며, 특히 초창기 외국 선교사들의 사역과 1970년대 한국교회의 부흥을 중심으로 한국교회의 역사를 깊이 있게 전달한다. 윤석전 목사는 젊은 세대가 이 전시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서울 구로구에 위치한 연세중앙교회(윤석전 담임목사)가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과 그 날들’이라는 주제로 한국 근현대사 사진전을 개최했다. 이번 전시는 구한말부터 시작해 한국교회의 부흥과 복음 전파의 역사적인 순간들을 담은 700여 장의 사진을 통해 한국교회의 성장과 하나님의 섭리를 기록하고 있다. 이 전시는 오는 10월 31일까지 계속되며, 연세중앙교회가 주최하고 대한역사문화원이 기획했다. 전시된 사진들은 주로 1880년대 이후 외국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선교 활동을 펼친 장면,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한국전쟁 중 선교사들의 활동, 그리고 1970년대 대규모 복음 집회를 중심으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주언 기자 | 고종의 해군 육성 의도와 함께 서양 선교사들의 발길이 닿은 인천 강화.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을 비롯해 선교사들이 남긴 흔적은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그곳에서 만나는 강화 기독교의 첫 세례 이야기와 서양 건축 양식을 한국적으로 변형한 흔적들이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강화성당, 한국 최초의 한옥 성당 건립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에 위치한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은 1900년에 지어진 한국 최초의 한옥 성당이다. 이곳은 서양의 바실리카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한옥의 재료와 조화를 이루며 독특한 건축미를 자랑한다. 특히 고종은 영국 해군력을 활용해 해군 양성에 힘쓰고자 하며, 영국성공회 선교사들의 활동이 가능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트롤로프 주교는 강화성당을 방주 모양으로 신축해 그 자취를 남겼다. 서양 선교사, 강화 해안에서 감리교 첫 세례 시행 강화도의 기독교 역사는 1893년 GH 존스 선교사가 배를 타고 강화 북편 해안에서 이승환의 어머니에게 첫 세례를 주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외국인에 대한 반감이 심했던 강화 주민들은 처음엔 선교사들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서서히 기독교로 개종하는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주언 기자 | 서울 연동교회가 창립 130주년을 맞아 천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아동 교육과 독립운동에 기여했던 발자취를 재조명하고 있다. 미국 선교사 사무엘 무어 목사의 헌신으로 시작된 교회는 현재까지 그 유산을 이어오고 있다. 서울 종로에 위치한 연동교회가 올해로 창립 130주년을 맞아 그간의 역사적 발자취를 돌아본다. 미국 선교사 사무엘 무어 목사의 헌신으로 시작된 이 교회는 천민을 비롯한 소외계층에 복음을 전하고, 아동 교육과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기독교 공동체로서 오늘날까지 그 신앙적 유산을 이어가고 있다. 사무엘 무어 목사, 연동교회의 창립과 헌신 연동교회의 역사는 1894년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 사무엘 무어(1860~1906) 목사로부터 시작된다. 무어 목사는 연꽃이 아름답게 피어있던 연못 옆에 교회를 세우며 복음을 전파했고, 당시 천민이었던 갖바치와 백정 등 소외된 이들에게도 문을 열었다. 그의 헌신이 한국교회 성장의 기틀이 되었다. 천민 출신 장로 배출, 소외계층과 함께한 130년 연동교회는 반상의 구별이 엄격했던 조선 시대에 천민에게 복음을 전하며 사회적 장벽을 허물었다. 특히 천민 출신 장로를 배출한 일은 당시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김효미 기자 | 사도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의 첫 기착지였던 구브로섬, 그중에서도 중요한 성지로 손꼽히는 살라미스는 바울의 동역자 바나바가 평생을 사역하며 묻힌 곳으로,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번 여정에서는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 구브로섬을 탐방하며, 특히 바나바의 생애와 사역을 집중 조명하였다. 바울과 바나바, 구브로섬에 첫 발을 내딛다 사도 바울의 첫 전도 여행은 터키의 안디옥에서 시작되어 실루기아 항구를 통해 구브로섬으로 이어졌다. 2000년 전 바울과 바나바가 이 길을 따라 전도 여행을 시작했던 그 여정을 오늘날에도 비슷하게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다. 비록 현대에는 실루기아 항구 대신 타슈쿠 항구에서 출발하는 배가 구브로섬으로 향하지만, 그 상징적인 의미는 여전히 크다. 밤새 달빛과 함께하는 배 여행 끝에 도착하는 구브로섬은 성경 속 이야기가 현실로 다가오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 현장, 살라미스 구브로섬의 동쪽 끝에 자리한 살라미스는 로마 시대에 중요한 항구 도시였다. 이곳은 바울과 바나바가 첫 전도 사역을 시작한 장소로, 당시의 번영을 엿볼 수 있는 거대한 원형극장과 아고라, 목욕탕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김효미 기자 | 사데 교회의 역사적 유적과 주님의 책망을 통해,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과 교훈을 살펴본다. 화려함과 외형에 집중하는 현대 교회는 예수님의 본질적 가르침에서 멀어진 것이 아니냐는 경고가 울린다. 하지만 소수의 의인들이 여전히 그 믿음을 지키고 있어 희망이 남아 있다. 사데 교회의 역사와 유적지_기원전 334년부터 시작된 사데의 역사적 유적들 사데 유적지에는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명령으로 시작된 아데미 여신 신전이 존재한다. 이 신전은 완성되지 못했지만, 그 뒤편에 비잔티움 시대에 붉은 벽돌로 지어진 작은 교회 유적이 남아있다. 사데 유적 발굴은 20세기 초부터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시작되었고, 현재는 하버드 대학에서 지속하고 있다. 사데는 현재 터키의 살리리 또는 사르트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유적지 옆으로 이즈미르와 연결된 도로가 지나간다. 사데 교회와 현대 한국교회의 유사점_외형은 번성했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 사데 교회는 당시 재정적으로 풍부하고 활동이 왕성했지만, 주님께서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죽은 자로다”라는 경고를 하셨다. 이 교회는 겉으로는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으나 내적으로는 영적으로 죽어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김효미 기자 |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 그룹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소속감을 찾도록 권면했다. 로마 교회의 성도들이 사회적 지위와 성별, 인종을 초월해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야 함을 강조했으며, 이는 오늘날 교회가 새로운 가족 공동체로서 소속감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공간과 예전을 통한 그리스도인의 삶 초기 로마 교회의 예배는 작고 단순한 공간에서 이루어졌으며, 공동식사를 통해 서로를 수용하고 사랑을 실천했다. 이러한 예전은 교회의 본질을 담아낼 수 있는 중요한 방식으로, 오늘날 교회도 새로운 상상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서사를 담아낼 수 있는 공간과 예전을 찾아야 한다는 권고가 이어졌다. 저항과 선행 사이의 균형을 찾는 성도들 바울은 성도들이 핍박 속에서도 사회에 공헌하는 매력적인 집단이 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로마 교회는 제국의 가치에 맹목적으로 순응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와 담을 쌓지 않는 이중적 정체성을 지닌 공동체여야 했다. 이러한 정체성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도 중요한 과제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