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김효미 기자 |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오해받았던 토마스 선교사가 철저한 신앙과 선교적 사명을 지닌 인물로 재조명되고 있다. 그의 유산을 기념하기 위한 사업이 백령도에서 활발히 진행 중이다. 제너럴셔먼호 사건 속 진실, 토마스 선교사의 헌신 재조명 유해석 교수(총신선교대학원·FIM국제선교회 대표)는 1월 22일, 서울 대림동 FIM국제선교회에서 열린 토마스 선교사 기념사업 관련 모임에서 참석자들에게 토마스 선교사의 진정한 삶과 사역을 소개했다. 그는 “토마스 선교사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인해 오해받아 왔다”며, “그는 철저한 청교도적 신앙과 선교 사명으로 조선 땅에 순교의 씨앗을 심었다”고 강조했다. 참석자들은 그의 발언에 깊은 공감을 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령도 기념관 건립, 희귀 자료와 함께 새 장 열다 유 교수는 토마스 선교사의 5대손에게서 전달받은 편지와 사진, 선교 보고서 등 희귀 자료 100여 점을 공개하며 큰 주목을 받았다. 특히, 이날 처음 공개된 토마스 선교사의 사진과 120여 년 전 조선 지도가 참석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는 “백령도에 세워질 기념관에 이 자료들을 전시해 토마스 선교사의 영적 유산을 널리 알리고 싶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류승우 기자 | 튀르키예 앙카라의 유서 깊은 역사 속으로, 기원전 켈트족의 정착에서부터 사도 바울의 발자취까지, 로마와 비잔티움 제국을 거쳐 오늘날 튀르키예 공화국의 수도로 자리 잡은 앙카라의 숨결이 살아 숨 쉰다. 켈트족의 정착지에서 로마 속주로, 갈라디아의 시작 ‘우윳빛’이라는 의미를 지닌 갈라디아는 기원전 4세기 켈트족의 이주와 함께 오늘날 튀르키예 중북부에 뿌리를 내렸다. 기원전 280년부터 시작된 갈라디아 왕국은 이후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앙크라(오늘날 앙카라)를 중심으로 번영했다.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앙카라 갈라디아의 중심 앙카라는 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의 통치를 받으며 번성했다. 오늘날에도 시내 곳곳에서 로마 시대의 성벽과 비잔티움 유적을 만날 수 있다. 앙카라 언덕 위의 성벽과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의 기념탑이 그 유산이다. 아타튀르크와 터키 공화국, 새로운 수도로서의 앙카라 제1차 세계대전 후 오스만 제국이 몰락하고,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아타튀르크는 수도를 콘스탄티노플에서 앙카라로 이전했다. 역사적 변화를 거친 앙카라는 오늘날에도 유적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언덕 위 빈민촌과 행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류승우 기자 | 히에라볼리, 오늘날 '파묵칼레'로 알려진 이곳은 라오디게아와 함께 성경 속 초기 교회와 로마 제국의 흔적을 간직한 유적지로, 석회암 온천과 고대 유적이 어우러진 독특한 풍경이 전 세계 여행자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성경 속 칭송과 책망이 공존한 라오디게아 라오디게아는 한때 아시아 지역의 부유한 상업 도시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은 "너희가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며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했다. 신앙심과 물질적 풍요 사이에서 균형을 잃었던 이 도시는 성경 속 대표적인 경고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언덕 위의 유적지에는 교회, 극장, 상업용 건축물들이 남아 있어 과거 도시의 번영을 엿볼 수 있다. 방문객들은 옛 도시를 거닐며 그곳에 살았던 이들의 삶과 신앙을 상상할 수 있다. ‘목화의 성’ 파묵칼레, 히에라볼리의 새로운 이름 히에라볼리는 오늘날 파묵칼레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석회암 온천수가 흘러내리며 수천 년에 걸쳐 형성된 계단식 지형은 마치 하얀 목화밭을 연상시킨다. 이 지역은 여전히 목화 재배로 유명하며, 자연과 문화의 조화가 돋보인다. 히에라볼리의 온천은 단순한 관광 명소가 아니라, 과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주언 기자 | 강화도 남서쪽 작은 섬, 주문도는 신앙과 역사의 숨결이 깃든 기도의 섬이다. 12월의 고요한 해안과 백년의 한옥 예배당은 현대인의 지친 마음을 위로하며 영적 여정을 제공한다. 배를 타고 떠나는 주문도의 여정 인천 강화도 선수선착장에서 출발한 배는 30분 만에 주문도에 닿는다. 나귀 턱뼈를 닮은 섬의 지형은 한적한 둘레길과 드넓은 해변으로 여행객을 맞이한다. 이곳에서 조선시대 시인 이민서의 시가 떠오르는 길을 걸으며 묵상의 시간을 갖는다. 변화를 품은 섬, 주문도의 신앙 역사 19세기 말까지 뱃사람들의 굿 소리로 북적였던 주문도는 1893년 영국 선교사 워너의 전도로 변화를 맞는다. 윤정일 전도인의 외침과 주민들의 개종은 마태복음의 말씀처럼 섬에 새로운 신앙 문화를 열었다. 신당은 교회로 바뀌었고, 섬 주민의 75%가 기독교인이 되었다. 아브라함의 막벨라 굴을 닮은 해안 동굴 뒷장술 해변과 대빈창 해변 사이 작은 동굴은 침묵과 묵상의 공간이다. 창세기의 막벨라 굴처럼 느껴지는 이곳에서 방문객들은 무한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조용히 기도에 잠긴다. 백년의 신앙을 품은 서도중앙교회 섬의 중심에는 1923년 지어진 한옥 기와집 예배당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주언 기자 | 조선의 부국강병을 꿈꾸며 고종은 미국을 통한 개화를 선택했다. 1884년 7월 2일, 고종은 미국의 선교사 매클레이가 제안한 병원과 학교 설립을 허가하고, 미국 상선의 조선 해상 운항과 통신망 설치를 결정했다. 그 결단은 조선의 개화와 독립을 위한 출발점이 되었으며, 이는 이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등의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의료 및 교육사업을 펼치는 계기가 되었다. 보빙사절단의 귀국과 미국 개혁 제안 미국을 방문한 보빙사절단은 1884년 귀국 후 고종에게 복명을 진행했다. 사절단의 부단장 홍영식은 기계 제조, 교통, 통신 등의 현대적 제도를 도입할 필요성을 역설하며 미국의 교육 방법을 본받아 인재 양성을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와 함께 미국 선교사 가우처와의 만남에서 매클레이 선교사를 통해 조선 선교 및 교육, 의료 사업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고종의 결단, 조선 부국강병 프로젝트 채택 고종은 보빙사절단의 보고와 매클레이의 제안을 수용, 1884년 7월 2일을 기점으로 조선의 개혁을 위한 종합 프로젝트를 채택했다. 이는 미국 상선의 항해 허가, 병원 및 학교 설립, 통신 시설 설치 등으로 이루어졌다. 이 프로젝트는 조선이 서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주언 기자 | 조선이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기 위한 개화의 길을 본격적으로 모색했다. 1883년 고종은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서구의 선진 문물을 배워 조선의 부국강병을 실현하고자 보빙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 사절단은 미국 곳곳을 탐방하며 새로운 국가 모델을 찾는 데 심혈을 기울였고, 이 과정에서 조선 선교의 계기를 마련하는 등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했다. 고종의 결단, 보빙 사절단 파견 배경 조선의 개화와 자강을 위해 고종은 보빙 사절단을 미국에 파견했다. 이는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서구 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고종의 전략적 결단이었다. 당시 조선은 국제정세의 급변 속에서 자국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개화 정책을 추진해야 할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미국으로 떠난 보빙 사절단, 선진 문물 탐방 시작 보빙 사절단은 1883년 9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뒤 뉴욕까지 대륙횡단을 하며 미국의 다양한 산업시설, 교육기관, 군사시설 등을 견학했다. 이들은 매일 밤 서로의 견문을 토론하고 서구의 문화를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 고종의 국서를 아서 대통령에게 전달하며 조선의 독립적 위상을 강화하고 개화 의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주언 기자 | 고종 황제가 맥클레이 선교사의 제안을 수락한 1884년의 결정은 단순한 병원과 학교 설립 허가가 아니었다. 국운이 기울어가던 상황에서 고종은 서구 문물을 도입해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려는 치열한 고민 속에 있었다. 미국 보빙사절단의 부사였던 홍영식의 보고와 일본에서 활동 중이던 맥클레이 선교사의 제안이 맞물리면서, 고종은 교육과 의료 개방을 선도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맥클레이와 김옥균, 고종을 움직인 그날 맥클레이 선교사는 1884년 6월 조선을 방문하여 김옥균과 접촉, 병원과 학교 설립을 제안하는 서신을 남겼다. 이후 7월 2일 밤, 고종은 이를 신중히 검토한 후 허가 결정을 내렸고, 다음 날 김옥균을 통해 맥클레이에게 이 사실이 전달되었다. 하지만 고종과 맥클레이가 직접 대면한 적이 없고, 제안서는 김옥균의 빈 집에 남겨졌다는 점에서 이는 당시 외교 및 정책적 고려 속에서 이루어진 결정임을 알 수 있다. 보빙사절단의 미국 방문과 그 영향 조선은 1883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외교 관계 강화를 위해 미국에 보빙사절단을 파견했다. 사절단은 미국 가우처 목사와 만나 조선의 사정을 알렸고, 가우처는 매클레이 선교사에게 조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김효미 기자 | 연세중앙교회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 근현대사 사진전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과 그 날들’은 구한말부터 현대까지 700여 장의 사진을 통해 대한민국 복음화의 역사와 선교사들의 헌신을 조명한다. 이번 전시는 약 100년 동안의 복음 전파의 순간들을 담아내며, 특히 초창기 외국 선교사들의 사역과 1970년대 한국교회의 부흥을 중심으로 한국교회의 역사를 깊이 있게 전달한다. 윤석전 목사는 젊은 세대가 이 전시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서울 구로구에 위치한 연세중앙교회(윤석전 담임목사)가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과 그 날들’이라는 주제로 한국 근현대사 사진전을 개최했다. 이번 전시는 구한말부터 시작해 한국교회의 부흥과 복음 전파의 역사적인 순간들을 담은 700여 장의 사진을 통해 한국교회의 성장과 하나님의 섭리를 기록하고 있다. 이 전시는 오는 10월 31일까지 계속되며, 연세중앙교회가 주최하고 대한역사문화원이 기획했다. 전시된 사진들은 주로 1880년대 이후 외국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선교 활동을 펼친 장면,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한국전쟁 중 선교사들의 활동, 그리고 1970년대 대규모 복음 집회를 중심으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주언 기자 | 고종의 해군 육성 의도와 함께 서양 선교사들의 발길이 닿은 인천 강화.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을 비롯해 선교사들이 남긴 흔적은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그곳에서 만나는 강화 기독교의 첫 세례 이야기와 서양 건축 양식을 한국적으로 변형한 흔적들이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강화성당, 한국 최초의 한옥 성당 건립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에 위치한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은 1900년에 지어진 한국 최초의 한옥 성당이다. 이곳은 서양의 바실리카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한옥의 재료와 조화를 이루며 독특한 건축미를 자랑한다. 특히 고종은 영국 해군력을 활용해 해군 양성에 힘쓰고자 하며, 영국성공회 선교사들의 활동이 가능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트롤로프 주교는 강화성당을 방주 모양으로 신축해 그 자취를 남겼다. 서양 선교사, 강화 해안에서 감리교 첫 세례 시행 강화도의 기독교 역사는 1893년 GH 존스 선교사가 배를 타고 강화 북편 해안에서 이승환의 어머니에게 첫 세례를 주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외국인에 대한 반감이 심했던 강화 주민들은 처음엔 선교사들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서서히 기독교로 개종하는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주언 기자 | 서울 연동교회가 창립 130주년을 맞아 천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아동 교육과 독립운동에 기여했던 발자취를 재조명하고 있다. 미국 선교사 사무엘 무어 목사의 헌신으로 시작된 교회는 현재까지 그 유산을 이어오고 있다. 서울 종로에 위치한 연동교회가 올해로 창립 130주년을 맞아 그간의 역사적 발자취를 돌아본다. 미국 선교사 사무엘 무어 목사의 헌신으로 시작된 이 교회는 천민을 비롯한 소외계층에 복음을 전하고, 아동 교육과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기독교 공동체로서 오늘날까지 그 신앙적 유산을 이어가고 있다. 사무엘 무어 목사, 연동교회의 창립과 헌신 연동교회의 역사는 1894년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 사무엘 무어(1860~1906) 목사로부터 시작된다. 무어 목사는 연꽃이 아름답게 피어있던 연못 옆에 교회를 세우며 복음을 전파했고, 당시 천민이었던 갖바치와 백정 등 소외된 이들에게도 문을 열었다. 그의 헌신이 한국교회 성장의 기틀이 되었다. 천민 출신 장로 배출, 소외계층과 함께한 130년 연동교회는 반상의 구별이 엄격했던 조선 시대에 천민에게 복음을 전하며 사회적 장벽을 허물었다. 특히 천민 출신 장로를 배출한 일은 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