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김효미 기자 |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묘사하며, 이 땅의 나라와는 차별화된 새로운 왕국의 시민으로서 그들의 정체성을 강조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세속적인 정치 집단과 구별되며, 사랑과 성령을 통해 성숙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새로운 왕국의 시민으로서의 교회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지역과 민족을 초월한 새로운 나라의 시민으로 정의했다. 에베소 교회는 단순한 종교 집단이 아닌, 그리스도를 왕과 주로 모시는 새로운 공동체로 설명됐다. 그는 “이 땅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과 분명히 달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그들이 하나님 백성의 총합으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지닌다고 밝혔다. 사회적·정치적 용어를 통한 에클레시아 묘사 바울이 사용한 '에클레시아'는 당시 에베소에서 정치적·법적 민회라는 의미를 지녔다.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자들의 집합체로 사용했다. 이는 로마 제국에서 황제와 국가의 관계를 머리와 몸으로 비유한 당시의 관습을 차용한 것으로, 바울은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교회를 그의 몸으로 비유하며 에베소 교회를 묘사했다. 차별성을 가진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윤리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세속적인 집단들과 분명히 구별되는 특징을 지닌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이전 전통과 단절되었음을 폴리테이아라는 용어를 통해 설명하며, 그들이 새로운 국가 안으로 들어왔다고 표현했다. 이러한 새로운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은 감정적·행위적 차원에서 더욱 뚜렷해졌고,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법을 넘어선 사랑과 성령을 통한 성숙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하게 권고했다. 철학을 초월한 새로운 윤리와 시민 정체성 당시 정치가들의 윤리적 덕목을 초월한 새로운 그리스도인 윤리는 바울에 의해 강조됐다. 그는 '온전한 사람'의 이미지를 그리스도인들에게 대입하며, 철학자들이 제시하는 지혜와 법 윤리를 뛰어넘는 도덕적 권면을 제안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군사에 비유해 새로운 국가와 시민의 정체성을 부여했으며, 그들은 사랑과 성령을 통해 더욱 성숙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김효미 기자 |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을 전파하고, 그들이 단순한 신자가 아닌 하나님의 동역자로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의 메시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정체성과 사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복음 사역 이후 성령의 은혜를 받아 동역자로 변화를 겪어야 한다는 강력한 도전을 받았다. 고린도에서의 바울의 첫 사역 고린도에서 바울의 복음 전파는 사도행전 18장에서 묘사된다. 그는 회당에서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임을 전하다가 쫓겨났으나, 인근 디도 유스도의 집에서 전도 활동을 계속했다. 결과적으로, 회당장 그리스보와 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았다. 바울의 고린도 첫 사역은 약 49년 봄에서 52년 봄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바울의 편지와 고린도 교회의 성장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떠난 후 성장했으나, 그 과정에서 문제도 발생했다. 바울은 55년 봄 에베소에서 고린도전서를 써 보냈고, 그 후 마게도냐에 도착해 고린도후서를 써 보냈다. 그의 편지들은 고린도 교회를 향한 깊은 관심을 보여주며, 교회가 단순한 신앙 공동체에서 더 큰 사명을 지닌 일꾼으로 변화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변화하는 고린도 교회의 정체성과 사명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초신자에서 일꾼, 즉 동역자로 성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들이 성령의 사람이 되어 '둘째 은혜'를 받아야 할 때라고 보았다. 이제 그들은 육신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자로서 새로운 정체성과 목표를 가져야 했다. 바울의 메시지는 고린도 교회에 중요한 도전이자 초대였다. 성도의 삶으로의 초대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성도의 삶을 살아갈 것을 요청했다. 그가 제시한 성도의 삶은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 죽은 것 같으나 살아 있는 자의 능력,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삶이었다. 이는 그들에게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초대장이었다. 고린도 교회의 바울 사역은 단순한 복음 전파를 넘어, 그들이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새로운 삶을 살도록 초대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도 이 초대장을 받고 있다.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김효미 기자 | 초기 기독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됐지만, 그 중심은 곧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땅끝까지 이동했다. 조재천 전주대 교수는 예루살렘이 교회의 탄생지이자 상징적 중요성을 가졌지만, 항구적인 교회의 터전은 될 수 없었던 신학적 이유를 분석했다. 항구적 교회의 터전이 아닌 상징적 출발지_예루살렘 교회의 탄생과 확장 조재천 교수는 "예루살렘 교회의 기원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의존하고 있다"며 발표를 시작했다. 예수의 마지막 행적이 있었던 예루살렘은 제2성전기 유대교 신앙의 상징적 장소였으며, 초기 기독교 역시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성령 강림 후 3천 명이 회심하는 사건을 계기로 교회는 확장되기 시작했다. 예루살렘에서의 교회의 중심 이동 조 교수는 예루살렘이 영구적인 교회의 터전이 될 수 없었던 이유를 제시했다. 사도행전 내러티브에서 교회의 중심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로, 그리고 땅끝까지 확장된다. 특히, A.D. 70년 성전 파괴는 예루살렘이 더 이상 교회의 중심이 될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고 강조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사건을 '메시아를 살해한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갈등 예루살렘은 옛 언약을 상징하는 장소로, 새 언약을 담기엔 부적합했다. 스데반의 설교에서 나타난 강력한 반-성전적 주제는, 가시적 성전이 아닌 영적·천상적 성전으로의 전환을 강조했다. 예루살렘 교회는 오순절 사건으로 시작됐지만, 스데반의 순교 이후 대대적인 박해로 인해 교인들은 흩어졌으며, 이로 인해 교회의 중심도 자연스럽게 이동하게 됐다. 예루살렘 교회의 소멸과 그 영향력 예루살렘 교회는 A.D. 43/44년경 또 한 번의 박해를 겪었고, 이후 사도행전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언급을 줄여간다. 몇몇 교부들의 저술에 따르면, 1차 유대전쟁 이후 예루살렘 교회는 데카폴리스로 피신했으며, 2차 유대전쟁 이후 예루살렘에 유대인 출입이 금지되면서 교회도 소멸돼 갔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다른 지역 교회들에 신학적·목회적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미쳤다. 조 교수의 연구는 초기 기독교의 역사적·신학적 전환을 재조명하며, 예루살렘 교회의 상징적 의미와 그 한계를 명확히 드러냈다.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김효미 기자 | 중세와 근대를 잇는 중요한 연결고리로 평가받는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고대 로마 문학과 인문주의 사상을 부활시키며 르네상스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의 문학적 유산은 당시 인문주의 태동의 계기가 되었으며,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옮겨가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페트라르카는 로마의 고대 영광을 기리며 새로운 문화적 흐름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르네상스의 문을 연 페트라르카 _ 고대 라틴어 문헌 발굴과 인문주의 태동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1304~1374)는 고대 로마의 라틴어 문서를 발굴하고 번역함으로써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의 학문은 신 중심의 스콜라 신학에 지배되고 있었으나, 페트라르카는 고대 문헌을 통해 인간 중심 사상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의 라틴어 연구는 새로운 학문적 욕구를 불러일으켰으며, 이를 통해 인문주의의 태동이 이루어졌다. 특히 키케로와 베르길리우스의 고전을 탐구하며, 인간 본연의 가치를 되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페트라르카의 사랑, 로르_단테의 베아트리체에 비견되는 연모의 대상, 로르 페트라르카는 아비뇽에서 교황청에 일하면서, 한 교회에서 만난 로르(Laure)라는 여인과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인해 평생을 사랑의 열병 속에 보냈다. 비록 그녀는 유부녀였고 그와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로르는 그의 마음속에서 영원한 구원의 여인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이상화한 것처럼, 페트라르카도 로르를 자신의 문학적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는 그녀를 추억하며 수많은 서정시를 썼고, 그중 대표작 칸초니에레는 유럽 시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페트라르카는 그녀의 죽음 이후에도 그녀를 동정녀 마리아처럼 이상화했으며, 그녀를 향한 사랑이 그가 문학가로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과거 로마의 영광을 기리며_위대한 로마 장군 스키피오에 대한 찬양, 서사시 ‘아프리카’ 페트라르카는 로마를 방문하면서 과거의 찬란했던 로마 제국의 영광을 떠올렸다. 당시 이탈리아는 여러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있었고, 로마의 위대함은 이미 쇠락한 상태였다. 그는 로마를 구한 위대한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떠올리며 그를 찬양하는 서사시 아프리카를 지었다. 이 작품을 통해 로마는 일시적으로나마 잃었던 자존심을 회복했고, 로마시의회는 페트라르카에게 계관 시인의 명예를 수여했다. 이는 페트라르카가 고대 로마 문화를 부활시키고자 한 열망의 결과물이었다. 중세와 근대 사이의 인물_라틴어의 고집과 인간 중심 사상의 출현 페트라르카는 고대 로마의 라틴어를 신성한 언어로 여기며 고집했다. 그는 단테가 신곡을 이탈리아 방언으로 기록한 것과 달리, 라틴어 문학에 천착했다. 당시 프랑스어, 히스파니아어, 이탈리아어로 분화된 언어들 속에서 페트라르카는 오직 고전 라틴어만이 인간 본연의 가치를 복원할 수 있는 열쇠라고 믿었다. 그의 문학은 단순한 언어적 고집을 넘어 인류가 고전으로 돌아가야만 인간의 인간다움을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스토아 철학을 존중하는 그의 사상에서 기인한 것이며, 인간의 자유의지로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철학적 주장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중세를 닫고 근대를 연 자_페트라르카, 중세의 종말을 고하고 근대를 연 인물로 평가받다 페트라르카는 중세 시대를 끝내고 근대를 연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어거스틴 이후 모든 것이 신에 의지하던 유럽 사상에서 벗어나 인간의 자유의지와 이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어거스틴이 신플라톤주의를 통해 신 중심의 사상을 정립했던 것과 달리, 페트라르카는 고대 로마의 인문학, 특히 키케로의 사상에 심취했다. 그는 인간 스스로가 고전에서 배우고 이를 통해 행복과 지혜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 사상은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 운동의 토대가 되었다. 페트라르카는 그의 문학적 유산과 사상으로 후대 예술가들과 철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서정시와 인문학적 연구는 근대 유럽 문화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특히 그가 남긴 소네트 형식의 시는 세익스피어를 비롯한 많은 후대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페트라르카는 단순히 르네상스의 아버지로 불릴 뿐만 아니라, 중세의 문을 닫고 근대의 문을 연 사상가이자 문학가로서 유럽 문학사와 사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가 주장한 인간의 자유의지와 고전적 가치의 회복은 이후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 정신을 이끄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김효미 기자 |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이 소장 중인 '대한민국임시정부 성립 축하문'과 '선언서'가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두 문서는 3.1운동 직후 임시정부 수립과 독립운동의 전개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독립운동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임시정부 성립 축하문과 선언서,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 숭실대학교(총장 장범식)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 중인 ‘대한민국임시정부 성립 축하문’과 ‘선언서’가 지난 12일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공식 지정됐다. 이 문서는 1919년 10월 31일 대한 민족대표 30인이 발행한 활판 인쇄 전단으로, 임시정부 수립과 독립운동 전개 양상을 담고 있어 귀중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임시정부 성립 기념, 국민의 독립 의지 담겨 ‘대한민국임시정부 성립 축하문’은 1919년 임시정부 출범을 기념해 이승만을 대통령,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는 통일 내각의 성립을 알렸다. 이 문서는 "10년의 노예생활을 벗어나 오늘에 다시 독립대한의 국민이 되었도다"라는 구절로 독립과 자유에 대한 강한 의지를 천명하고 있으며, 국민의 결의와 독립에 대한 열망을 드러낸다. 특히 “이천만 자유민아! 일어나 자유의 전쟁을 벌일지어다”라는 구절을 통해 국민들에게 지속적인 독립투쟁을 촉구하고 있다. 독립운동 방향을 제시한 선언서 1919년 10월 31일 중국 상해에서 발행된 ‘선언서’는 3.1운동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고 민족의 단결을 호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선언서는 일제의 잔학한 통치를 고발하고, 3.1운동 이후 일제의 통치 방식 변화를 반박하며 우리 민족의 완전한 독립 요구를 명확히 선언했다. 국한문 혼용체로 작성된 선언서는 비폭력과 질서 있는 독립운동을 강조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국민들에게 자위행동 시에도 약자를 보호할 것을 촉구하는 공약 3장이 포함돼 있다. 역사적 가치 재조명과 보존 노력 이 문서는 오랫동안 문헌으로만 존재가 알려졌으나, 1967년 김양선 교수가 숭실대에 기증하며 유일한 실물 전단이 공개됐다.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은 이번 국가등록문화유산 지정이 두 문서의 역사적 중요성을 알리고 보존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며, 유물 보존과 관리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독립운동의 귀중한 역사를 담은 이 문서는 앞으로도 많은 국민이 그 가치를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공개될 예정이다.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주기범 기자 |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이 개교 127주년을 맞아 해외 기독교 유물 특별전시회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회는 미국의 인스파이어드 전시회와 협업하여, 성서의 기록과 전파 과정, 그리고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흐름을 조망하는 의미 있는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성서의 역사적 배경을 보여주는 1부 전시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은 10월 10일부터 12월 30일까지 '영감 Inspiration, 흔적 Traces, 숭실 Soongsil' 전시회를 통해 성서의 기원과 역사적 배경을 소개한다. 특히, 이번 전시회는 고대 성서 유물인 ‘대이사야서 두루마리’와 ‘파피루스 52’ 등 중요한 성서 사본을 선보이며, 관람객들에게 성서의 깊은 역사적 의미를 전달할 예정이다. 루터와 종교개혁의 흔적, 2부 전시 2부 전시에서는 마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과 독일어로 번역된 신약 성경 원본 등 종교개혁과 관련된 유물이 공개된다. 종교개혁의 중요한 순간들을 담은 이 유물들은 루터의 사상과 종교개혁이 성서 전파에 미친 영향을 강조하며, 면벌부 논쟁을 비롯한 당시의 종교적 이슈들을 생생하게 조명한다. 한국 기독교와 숭실대의 역사, 3부 전시 3부 전시는 한국 기독교의 역사와 숭실대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한글로 번역된 최초의 신약성경 '예수성교전서' 원본을 비롯해 숭실대 설립자 베어드와 한경직 목사 등 학교를 이끈 주요 인물들의 유품이 전시될 예정이다. 이를 통해 숭실대의 역사와 기독교적 가치관의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열리며, 입장료는 무료다. 온라인 해설은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로 제공된다.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주기범 기자 | 지구촌교회가 제4대 담임목사 청빙과 교회의 미래 준비를 위해 ‘미래준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위원회는 성도들의 의견을 반영해 구성됐으며, 교회 분립 연구 및 다음 세대 공간 마련 등 여러 과제를 수행할 예정이다. 담임목사 청빙 위한 미래준비위 출범 지구촌교회는 10월 6일 임시제직회를 통해 제4대 담임목사 청빙을 위한 ‘미래준비위원회’를 공식 출범시켰다. 이번 위원회 출범은 교회가 향후 30년을 준비하기 위한 첫 걸음으로, 사전 설문조사를 통해 성도들의 의견을 수렴한 뒤, 제직회의 승인을 받았다. 위원으로는 성도들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19명이 최종 참여하게 됐다. 제직회에서는 만장일치로 이들의 위원 선정을 축복하고 격려했다. 위원회, 담임목사 청빙 및 교회 분립 연구 진행 미래준비위원회는 향후 4개월간 제4대 담임목사 청빙 외에도 교회 분립 연구 및 다음 세대를 위한 공간 마련 등 다양한 과제를 수행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성도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의견을 반영할 계획이다. 위원회는 필요에 따라 임기를 연장할 수 있으며, 활동 기간 중 교회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손정훈 목사는 현재 신임 담임목사 청빙 시까지 직무대행을 맡고 있으며, 성도들의 적극적인 기도 참여에 힘입어 이번 위원회 출범이 가능했다고 전했다. 뜨거운 기도 속에 교회 미래 준비 지구촌교회는 이번 임시제직회 이전에도 특별새벽기도회를 통해 성도들의 영적 결속을 다졌다. 지난 9월 23일부터 10월 5일까지 진행된 ‘추수감사 특별새벽기도회’에는 예년보다 많은 성도가 참여해 치유와 회복의 시간을 가졌다. 한 집사는 기도회 소감을 전하며,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더욱 건강하게 세워질 것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지구촌교회는 이러한 분위기를 이어가며 다가오는 ‘블레싱 2024’ 전도 집회도 준비하고 있다. ‘블레싱 2024’로 이어지는 영적 부흥 10월 27일부터 시작되는 ‘블레싱 2024’는 지구촌교회의 대표적인 전도 집회로, 분당, 향수, 파워웬즈데이, 시니어, 수지 등 5개의 집회로 나뉘어 진행된다. 집회에는 이동원 원로목사와 해외 목회자들, 선교사 및 연예인 간증자가 함께하며 성도들과의 소통을 이어갈 예정이다. 이번 집회는 교회의 사역 비전을 확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김효미 기자 | 사도 바울은 구브로 섬에서 로마 총독 서기오 바울에게 복음을 전하며 첫 선교 여행의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 여행에서 바울은 예수님에 의해 부활한 나사로와, 전도 동반자였던 바나바의 흔적을 찾아갔다. 구브로 섬에서의 전도 여행은 고대 기독교의 중요한 성지로 자리 잡았으며, 오늘날에도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구브로 섬에서의 선교 시작: 살라미에서 바보까지 사도 바울은 구브로 섬의 동쪽에 위치한 살라미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선교를 시작했다. 당시 구브로 섬은 동서로 길쭉하게 뻗어 있는 섬으로, 동쪽 끝 살라미에서 서쪽 끝 바보까지 약 200km를 이동하며 복음을 전했다. 이 구간에서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섬을 가로질러 걸으며, 다양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바보는 로마 총독부가 위치한 중요한 항구 도시로, 바울의 선교 여행에서 중요한 목적지였다. 구브로 섬은 그리스계와 튀르키예(터키)계로 나뉘어 분단된 지역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당시에도 다양한 문화와 민족이 혼재하던 지역이었다. 바울은 이러한 문화적 다양성을 넘어서, 복음을 전하는 데 큰 열정을 보였다. 나사로의 무덤: 라나카에서 찾은 역사적 흔적 라나카는 구브로 섬에서 나사로의 무덤이 있는 중요한 도시로, 예수님에 의해 부활한 나사로가 목회하고 죽음을 맞이한 곳으로 전해진다. 예루살렘에서 부활한 후 나사로는 구브로 섬으로 건너와, 남은 생애 동안 이곳에서 전도 활동을 펼쳤다. 나사로는 라나카에서 평생 목회를 하다가 사망했고, 그를 기념하는 교회와 무덤이 자리 잡고 있다. 6세기부터 나사로의 무덤으로 알려진 이곳은 기독교의 역사적 성지로 자리매김하였으며, 특히 무덤은 교회 지하에 위치해 있어 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와 기도하는 장소로 유명하다. 나사로의 무덤은 크고 작은 석관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석관에는 나사로의 일대기가 부조로 새겨져 있다. 예수님께서 그를 부활시키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는 이 무덤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깊은 영적 영감을 주는 장소로 남아 있다. 기팀의 어원: 키티온 지역에서의 성경적 유래 구브로 섬의 라나카 지역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위치한 키티온은 성경에서 '기팀'으로 불렸던 지역이다. 구약 성경 창세기와 민수기, 역대상, 그리고 이사야서에서 등장하는 '기팀'이라는 이름은 바로 이 키티온에서 유래되었다. 이 지역은 고대 도시 왕국으로, 기원전 13세기부터 4세기까지 구브로 섬의 중요한 중심지였다. 키티온은 특히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번성한 도시로 알려져 있으며, 이 지역은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의 깊은 연관성을 보여준다. 아프로디테 신전 등 다양한 유적이 발견된 이곳은 구브로 섬의 고대 역사를 탐구할 수 있는 중요한 고고학적 현장으로 남아 있다. 키티온은 구브로 섬이 기독교 복음 전파의 중요한 기점이 되었던 만큼, 성경적 역사의 시작점으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바보에서 로마 총독에게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 구브로 섬의 서쪽 끝에 위치한 바보는 사도 바울이 로마 총독 서기오 바울에게 복음을 전한 중요한 도시이다. 이곳에서 바울은 서기오 바울을 만나 복음을 전파했으며, 로마 총독은 바울의 전도를 듣고 회심했다. 이 만남은 바울의 전도 활동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었으며, 구브로 섬 전역에 복음을 전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서기오 바울과의 만남 후, 바울은 구브로 섬을 떠나 터키 본토로 향하게 되었다. 그는 바보 항구에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로 이동하여, 1차 전도 여행의 다음 단계를 이어나갔다. 이때 바울은 로마 제국의 여러 도시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바보에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다가 40에 한 대 감한 매를 맞았다고 전해지는 장소로 유명한 채찍 기념교회가 있다. 전통에 따르면, 바울은 이곳에서 로마 당국에 의해 채찍을 맞았으며, 이는 그의 선교 여정 중 여러 차례 겪었던 고난 중 하나였다. 기념교회는 바울의 헌신과 고난을 상징하며, 오늘날에도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방문해 그 정신을 기리고 있다. 바울의 채찍 기념교회는 영국 성공회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매년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올린다. 이 교회는 사도 바울의 헌신적인 선교 활동을 상징하는 유적지로서, 전 세계에서 오는 기독교 순례자들에게 중요한 방문 장소로 자리잡았다. 구브로 섬의 역사적 중요성: 분단을 넘어선 자유로운 왕래 구브로 섬은 그리스계와 터키계로 나뉘어 오랜 기간 분단된 지역으로 남아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비교적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1970년대 북사이프로스와 남사이프로스 사이에 벌어진 전쟁 이후로, 두 지역은 오랜 갈등을 겪었으나 최근에는 점차 왕래가 자유로워졌다. 구브로 섬은 전략적으로 지중해 동부에서 중요한 요충지로 자리 잡고 있었으며, 오스만 제국, 베네치아 공화국, 영국 등 여러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구브로 섬은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뿐만 아니라, 고대부터 현대까지 지중해를 둘러싼 다양한 문화와 종교의 충돌과 융합이 일어났던 장소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바울과 바나바, 나사로 등의 인물들이 이 섬에서 복음을 전하며, 구브로 섬은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성지로서 깊은 의미를 지닌다. 구브로 섬을 따라간 사도 바울의 전도 여정은 그의 첫 선교 여행의 주요한 시작점이자, 기독교 복음 전파의 중요한 사건들로 가득 찬 역사적 장소였다. 오늘날 구브로 섬은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를 따라가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며, 그리스계와 터키계의 분단의 역사를 넘어서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가는 평화의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다.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김효미 기자 | 사도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로 추정되는 더베를 향한 여정이 이어지고 있다. 터키 카라만(Karaman) 지역 일대에서 발견된 유적들은 오늘날 더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으며, 이곳에서 기독교의 초기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 여정을 따라가며 역사적 감동을 재현하는 여정이 성지순례자들을 매료시킨다. 사도 바울의 1차 전도여행, 더베를 향하다 사도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의 종착지였던 더베로 추정되는 터키 남부의 카라만 지역이 성지순례자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바울이 걸었던 로마 시대의 길을 따라, 고대 도시 더베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여정이 시작됐다. 현대에 들어서 더베로 가는 길은 새롭게 조성된 고속도로로 변모했지만, 순례자들은 여전히 옛 로마의 고대 길의 자취를 찾아보고 있다. 더베의 잔재, 카라만 박물관에서 확인하다 카라만 박물관에 보관된 유물들은 더베의 위치를 밝혀내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특히 더베의 주교였던 미카엘의 비석은 이 지역이 더베였음을 강하게 시사하는 증거로 평가받는다. 이 비석은 기원후 4세기에서 6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더베가 한때 기독교의 중요한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고대 도시의 흔적을 따라 고대 로마 시대 때 번성했던 더베는 오늘날 작은 농촌 마을로 변모했지만, 유적지로 남아 있는 텔(Tell) 언덕이 당시의 번영을 말해준다. 텔의 정상에서는 발굴 흔적을 볼 수 있으며, 평원을 가득 메운 곡창지대를 통해 더베의 상업적 발전을 확인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이 이곳을 전도지로 선택한 이유 역시 이러한 상업적 번영 때문이었다. 벤비르 마을에서 찾은 기독교 흔적 벤비르 마을은 사도 바울이 더베로 전도를 다니며 남긴 흔적을 간직한 지역 중 하나로 추정된다.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와 451년 칼케돈 종교회의에 기록된 이 마을은 교회와 수도원이 번성했던 곳으로, 당시 기독교가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이곳의 14개의 교회와 예배처는 당시 기독교가 이 지역에서 얼마나 깊은 뿌리를 내렸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역사와 일상, 성지순례의 감동 현지인들이 살고 있는 벤비르 마을에서의 따뜻한 환대는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을 떠올리게 한다. 농가에서 대접받은 간소한 식사는 순례자들에게 2천 년 전 사도 바울의 여정을 더욱 생생하게 체험하게 해준다. 성지순례자들은 고대의 유물과 현재의 삶이 공존하는 이 지역에서 역사의 감동과 신앙의 중요성을 되새기고 있다.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김효미 기자 | 사도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이 시작된 터키의 안디옥(수리아 안디옥)은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장소로 평가받고 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받는 가운데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받은 곳이며, 바울과 바나바를 첫 해외 선교사로 파송한 교회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1년 전 대지진으로 인해 이 지역은 큰 피해를 입었고, 지금은 복구 작업이 진행 중이다. 사도 바울의 첫 전도 여행 출발지 '안디옥'의 역사적 중요성 안디옥은 로마 제국 시절 수리아 지역의 수도로, 초기 기독교의 부흥을 이끈 중요한 장소였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에서 핍박을 피해 온 기독교인들이 이곳에서 공동체를 형성하고, 바울과 바나바가 첫 해외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이는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이곳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고대 유대교와 기독교가 공존하던 '안디옥'의 흔적 안디옥은 유대인 공동체가 기독교 공동체와 함께 번성한 도시였다. 이 도시는 오론테스강을 따라 번영했으며, 유대인 지구와 기독교 지구가 공존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핍박을 피해 동굴에서 예배를 드렸으며, 이 동굴 교회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베드로 동굴 교회는 기독교의 신앙적 상징으로, 박해 속에서도 교회가 부흥하던 장소다. 대지진 후 복구 진행 중인 안디옥…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노력 2023년 발생한 대지진으로 안디옥의 90% 이상이 파괴되었으나, 현재 복구 작업이 진행 중이다. 호텔과 상점이 다시 열리고 있으며, 안디옥의 재건을 위한 노력이 활발하다. 특히, 한국교회가 개신교 건물을 구입해 복구를 시도하는 모습도 눈에 띈다. 지진 피해 속에서도 안디옥 시민들은 재건을 위해 다시 일어서고 있으며, 역사적 기독교 유적지 역시 복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안디옥개신교회( 2000년 6월 29일 광림감리교회에 의해 창립 터키 안디옥 개산교회는 2000년 6월 29일 광림감리교회에 의해 창립 되었다. 1993년 안디옥을 성지 순례한 광림교회 김선도 목사가 안디옥 선교에 대한 비젼을 가지고 7년간의 기도 끝에 1999년 안타키아 시청 옆의 건물을(지상3층, 지하1층) 매입하여 봉헌 하였다. 신앙의 상징, 베드로 동굴 교회와 유대인 지구 발굴 현황 지진으로 인해 파괴된 안디옥에서는 로마 시대의 유대인 지구와 기독교 유적지들이 발굴되고 있다. 베드로 동굴 교회는 박해 속에서도 교회가 존재했던 역사의 산 증거로 남아 있으며, 유대인들이 형성한 공동체의 흔적도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다. 이곳은 기독교, 유대교, 정교회가 공존하던 역사적 중심지로 평가받고 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부흥과 사도 바울의 선교 여정을 상징하는 실루기아 항구 실루기아는 수리아 왕 실루기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항구로, 그의 무덤도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사도행전의 기록에 따르면, 바울과 바나바가 이곳에서 구브로를 향해 첫 전도 여행을 시작했다. 오늘날 실루기아의 방파제에서 지중해를 바라보면, 2000년 전 이곳을 떠나던 사도 바울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이와 같은 안디옥의 복구와 신앙적 유산이 다시금 재건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