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김효미 기자 | 시각장애를 극복하고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며 장애인식 개선에 앞장서온 유예은 씨(22)가 '제2회 인류애실천 분중문화상' 시상식에서 '최우수인재상'을 수상했다. 유 씨는 한 번 들은 곡을 완벽히 연주하는 천재적 음악 실력으로, 예술 활동을 통해 장애인들의 문화예술 참여의 지평을 넓혔다. 밀알콘서트에서 시작된 여정 시각장애를 안고 태어난 유예은 씨는 2008년, 만 6세의 어린 나이에 제5회 밀알콘서트 무대에 오르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그녀는 뛰어난 연주 실력으로 화제를 모으며 음악계의 주목을 받았고, 2023년에는 제20회 밀알콘서트에서 처음으로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성장을 이어갔다. 음악으로 나누는 희망 유예은 씨는 연주를 통해 장애인식 개선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번 인류애실천 분중문화상에서 최우수인재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아프고 슬픈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음악 사역자가 되고 싶다"며 앞으로도 희망을 전달하는 피아니스트로 활동을 이어가겠다는 다짐을 전했다. 밀알복지재단과 함께하는 도전 지난해 밀알복지재단의 교회협력 홍보대사로 위촉된 유 씨는 장애인식 개선과 나눔 확산을 위한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밀알복지재단 정형석 상임대표는 "유예은 홍보대사는 장애와 관계없이 뛰어난 연주 실력으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고 평가하며 그녀의 수상을 축하했다. 인류애실천 분중문화상의 의미 이번 시상식은 인류애와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유능한 인재들을 격려하고, 기독교적 인류애 실천 문화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하기 위해 마련됐다. 인류애실천 분중문화재단과 국민일보가 공동 주최한 이 상은 대한민국 문화예술계의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공로를 세운 이들을 기리고 있다. 유예은 피아니스트의 이번 수상은 그녀가 걸어온 음악적 여정과 앞으로 펼칠 도전을 응원하는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도전은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을 주며, 더 많은 장애인 예술가들이 세상에 나설 수 있도록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김효미 기자 |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는 12월 20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한국교회의 밤’ 행사를 열기로 결정했다. 또한 남가주교회협의회와의 업무협약 및 한기총 미주총회 관련 문제도 논의했다. 한기총, ‘한국교회의 밤’ 12월 20일 롯데호텔에서 개최 한국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정서영 목사, 이하 한기총)는 올해 ‘한국교회의 밤’ 행사를 오는 12월 20일(금) 오후 5시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이번 결정은 10월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서 열린 제35-7차 임원회에서 이루어졌다. 이날 회의에는 22명이 참석하고 33명이 위임한 가운데 진행되었으며, 개회선언 후 전 회의록 채택, 경과 및 사업보고와 함께 안건토의가 이어졌다. 남가주교회협의회와 업무협약 체결 예정 한기총은 남가주교회협의회(회장 최영봉 목사)와의 업무협약을 11월 중에 체결하기로 했다. 이번 협약은 한기총의 외연 확장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회의에 참석한 임원들은 이번 협약이 한기총의 대외적 활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다. 미주총회 관련 문제 정리, 해외 단체 설립은 임원회 결의로 진행 한기총 미주총회 총회장 임명의 건에 대해서는 현재 최소 2개 이상의 한기총 미주총회가 존재하는 것을 확인하고, '한기총 미주총회'라는 명칭 사용을 정리하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한기총을 위해 활동해 온 미주총회의 노고는 치하했으나, 향후 해외 총회나 단체 설립 및 해산 문제는 임원회의 결의에 따라 진행하기로 했다. 한국기독교복음선교사업단 청원 관련 논의 한국기독교복음선교사업단(대표 김덕겸 목사)의 청원에 대해서는 해당 단체가 한기총 회원단체가 아니므로 관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는 한기총의 기존 원칙을 따르는 결정이었다. 예배와 함께한 임원회 임원회에 앞서 진행된 예배는 공동회장 정창모 목사의 사회로 시작되었으며, 공동회장 이현숙 목사가 기도하고 명예회장 김용도 목사가 ‘창조의 목적’(창세기 1:1-2)을 주제로 설교했다. 명예회장 박홍자 장로의 기도로 예배는 폐회되었다. 한기총은 앞으로도 한국교회의 발전을 위해 다양한 행사와 협약을 통해 대내외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해나갈 계획이다.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김효미 기자 | 한국이 유엔 인권이사회 이사국으로 당선돼 2025년부터 3년간 활동을 시작한다. 한국은 앞으로 북한 인권 문제를 비롯한 국제 인권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계획이다. 한국, 161개국 지지로 아시아·태평양 지역 5개국 중 4위로 당선 한국은 9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 인권이사회 이사국 선거에서 190개 참가국 중 161개국의 지지를 얻어 당선됐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는 한국, 키프로스, 마셜제도, 카타르, 태국이 이사국으로 선출됐다. 반면, 사우디아라비아는 111개국의 지지를 받았으나 이사국 선출에 실패했다. 유엔 인권이사회, 국제사회의 인권 문제 해결 위한 주요 기구 유엔 인권이사회는 2006년 유엔총회 결의를 통해 창설된 기구로, 인권을 국제사회 3대 과제 중 하나로 격상시켰다. 이사회는 국제 인권과 자유 증진을 목표로 중대한 인권 침해를 해결하고 권고하는 역할을 한다. 이사국은 3년 임기로 47개국으로 구성되며 매년 3분의 1이 교체된다. 외교부, "북한 인권 문제 적극 해결할 것" 한국 외교부는 유엔 인권이사회 이사국으로 선출된 것에 대해 “인권을 중시하는 한국의 외교적 성과”라며, “앞으로 3년간 북한 인권을 포함한 국제 인권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당선은 한국의 국제사회에서 인권 문제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중요한 계기로 평가된다. 한국의 유엔 인권이사회 이사국 당선은 인권 증진과 국제 사회의 평화 및 안정을 위한 발판이 될 전망이다.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김효미 기자 | 사데 교회의 역사적 유적과 주님의 책망을 통해,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과 교훈을 살펴본다. 화려함과 외형에 집중하는 현대 교회는 예수님의 본질적 가르침에서 멀어진 것이 아니냐는 경고가 울린다. 하지만 소수의 의인들이 여전히 그 믿음을 지키고 있어 희망이 남아 있다. 사데 교회의 역사와 유적지_기원전 334년부터 시작된 사데의 역사적 유적들 사데 유적지에는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명령으로 시작된 아데미 여신 신전이 존재한다. 이 신전은 완성되지 못했지만, 그 뒤편에 비잔티움 시대에 붉은 벽돌로 지어진 작은 교회 유적이 남아있다. 사데 유적 발굴은 20세기 초부터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시작되었고, 현재는 하버드 대학에서 지속하고 있다. 사데는 현재 터키의 살리리 또는 사르트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유적지 옆으로 이즈미르와 연결된 도로가 지나간다. 사데 교회와 현대 한국교회의 유사점_외형은 번성했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 사데 교회는 당시 재정적으로 풍부하고 활동이 왕성했지만, 주님께서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죽은 자로다”라는 경고를 하셨다. 이 교회는 겉으로는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으나 내적으로는 영적으로 죽어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많은 대형 교회들 역시 겉모습만 화려하고, 그 속은 비어 있는 모습을 보인다. 한국 교회들은 기독교의 본질보다는 다양한 사회봉사 활동이나 이벤트성 행사에 치중하고 있어, 신앙의 핵심을 잃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기독교 인본주의 신앙의 위험성_기독교 본질에서 벗어난 현대 교회의 흐름 오늘날 한국 교회들은 기독교 합리주의, 윤리주의, 철학주의 등 인간 중심의 신앙을 강조하며, 본래의 성경 가르침에서 멀어지고 있다. 불우이웃 돕기, 탈북민 지원, 다문화 가정 돕기 등과 같은 다양한 사회적 활동들은 중요한 일일 수 있으나, 기독교의 본질적인 사명과는 다르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활동들은 그럴듯하게 보일 수 있으나, 깊이 살펴보면 진정한 신앙의 핵심과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본을 따르지 않는 현대 교회_사도 바울이 기독교를 전파한 방법과 비교 사도 바울은 로마 제국을 기독교 국가로 변화시키기 위해 사회적인 활동이나 협회 직책에 얽매이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을 전하는 데 집중하며, 로마 제국에 복음을 전파했다. 현대 한국 교회가 사도 바울의 방법을 본받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화려한 봉사 활동보다 신앙의 본질에 충실한 교회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소수의 의인들, 그리고 한국 교회의 희망_주님께 칭찬받은 소수의 의인들, 오늘날에도 존재 사데 교회에서도 소수의 의인들이 있었고, 주님은 그들을 칭찬하셨다. 오늘날 한국 교회 역시 외형에 치중한 다수의 교회들 가운데, 이름없이 헌신하는 소수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이들은 주님의 말씀에 충실하며, 하나님을 온전하게 섬기고 있다. 이들을 통해 한국 교회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데 교회와는 다른 면모도 보인다. 한국 교회의 미래와 과제_진정한 신앙 회복이 필요한 때 오늘날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사데 교회의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주일 성수와 같은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목회자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제는 다시금 본질로 돌아가, 진실된 신앙 생활을 회복해야 할 때이다. 그렇게 할 때, 한국 교회는 다시금 부흥할 것이며, 대한민국도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번영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김효미 기자 |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 그룹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소속감을 찾도록 권면했다. 로마 교회의 성도들이 사회적 지위와 성별, 인종을 초월해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야 함을 강조했으며, 이는 오늘날 교회가 새로운 가족 공동체로서 소속감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공간과 예전을 통한 그리스도인의 삶 초기 로마 교회의 예배는 작고 단순한 공간에서 이루어졌으며, 공동식사를 통해 서로를 수용하고 사랑을 실천했다. 이러한 예전은 교회의 본질을 담아낼 수 있는 중요한 방식으로, 오늘날 교회도 새로운 상상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서사를 담아낼 수 있는 공간과 예전을 찾아야 한다는 권고가 이어졌다. 저항과 선행 사이의 균형을 찾는 성도들 바울은 성도들이 핍박 속에서도 사회에 공헌하는 매력적인 집단이 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로마 교회는 제국의 가치에 맹목적으로 순응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와 담을 쌓지 않는 이중적 정체성을 지닌 공동체여야 했다. 이러한 정체성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도 중요한 과제라고 지적했다.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김효미 기자 |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묘사하며, 이 땅의 나라와는 차별화된 새로운 왕국의 시민으로서 그들의 정체성을 강조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세속적인 정치 집단과 구별되며, 사랑과 성령을 통해 성숙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새로운 왕국의 시민으로서의 교회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지역과 민족을 초월한 새로운 나라의 시민으로 정의했다. 에베소 교회는 단순한 종교 집단이 아닌, 그리스도를 왕과 주로 모시는 새로운 공동체로 설명됐다. 그는 “이 땅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과 분명히 달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그들이 하나님 백성의 총합으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지닌다고 밝혔다. 사회적·정치적 용어를 통한 에클레시아 묘사 바울이 사용한 '에클레시아'는 당시 에베소에서 정치적·법적 민회라는 의미를 지녔다.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자들의 집합체로 사용했다. 이는 로마 제국에서 황제와 국가의 관계를 머리와 몸으로 비유한 당시의 관습을 차용한 것으로, 바울은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교회를 그의 몸으로 비유하며 에베소 교회를 묘사했다. 차별성을 가진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윤리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세속적인 집단들과 분명히 구별되는 특징을 지닌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이전 전통과 단절되었음을 폴리테이아라는 용어를 통해 설명하며, 그들이 새로운 국가 안으로 들어왔다고 표현했다. 이러한 새로운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은 감정적·행위적 차원에서 더욱 뚜렷해졌고,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법을 넘어선 사랑과 성령을 통한 성숙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하게 권고했다. 철학을 초월한 새로운 윤리와 시민 정체성 당시 정치가들의 윤리적 덕목을 초월한 새로운 그리스도인 윤리는 바울에 의해 강조됐다. 그는 '온전한 사람'의 이미지를 그리스도인들에게 대입하며, 철학자들이 제시하는 지혜와 법 윤리를 뛰어넘는 도덕적 권면을 제안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군사에 비유해 새로운 국가와 시민의 정체성을 부여했으며, 그들은 사랑과 성령을 통해 더욱 성숙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김효미 기자 |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을 전파하고, 그들이 단순한 신자가 아닌 하나님의 동역자로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의 메시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정체성과 사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복음 사역 이후 성령의 은혜를 받아 동역자로 변화를 겪어야 한다는 강력한 도전을 받았다. 고린도에서의 바울의 첫 사역 고린도에서 바울의 복음 전파는 사도행전 18장에서 묘사된다. 그는 회당에서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임을 전하다가 쫓겨났으나, 인근 디도 유스도의 집에서 전도 활동을 계속했다. 결과적으로, 회당장 그리스보와 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았다. 바울의 고린도 첫 사역은 약 49년 봄에서 52년 봄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바울의 편지와 고린도 교회의 성장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떠난 후 성장했으나, 그 과정에서 문제도 발생했다. 바울은 55년 봄 에베소에서 고린도전서를 써 보냈고, 그 후 마게도냐에 도착해 고린도후서를 써 보냈다. 그의 편지들은 고린도 교회를 향한 깊은 관심을 보여주며, 교회가 단순한 신앙 공동체에서 더 큰 사명을 지닌 일꾼으로 변화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변화하는 고린도 교회의 정체성과 사명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초신자에서 일꾼, 즉 동역자로 성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들이 성령의 사람이 되어 '둘째 은혜'를 받아야 할 때라고 보았다. 이제 그들은 육신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자로서 새로운 정체성과 목표를 가져야 했다. 바울의 메시지는 고린도 교회에 중요한 도전이자 초대였다. 성도의 삶으로의 초대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성도의 삶을 살아갈 것을 요청했다. 그가 제시한 성도의 삶은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 죽은 것 같으나 살아 있는 자의 능력,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삶이었다. 이는 그들에게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초대장이었다. 고린도 교회의 바울 사역은 단순한 복음 전파를 넘어, 그들이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새로운 삶을 살도록 초대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도 이 초대장을 받고 있다.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김효미 기자 | 초기 기독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됐지만, 그 중심은 곧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땅끝까지 이동했다. 조재천 전주대 교수는 예루살렘이 교회의 탄생지이자 상징적 중요성을 가졌지만, 항구적인 교회의 터전은 될 수 없었던 신학적 이유를 분석했다. 항구적 교회의 터전이 아닌 상징적 출발지_예루살렘 교회의 탄생과 확장 조재천 교수는 "예루살렘 교회의 기원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의존하고 있다"며 발표를 시작했다. 예수의 마지막 행적이 있었던 예루살렘은 제2성전기 유대교 신앙의 상징적 장소였으며, 초기 기독교 역시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성령 강림 후 3천 명이 회심하는 사건을 계기로 교회는 확장되기 시작했다. 예루살렘에서의 교회의 중심 이동 조 교수는 예루살렘이 영구적인 교회의 터전이 될 수 없었던 이유를 제시했다. 사도행전 내러티브에서 교회의 중심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로, 그리고 땅끝까지 확장된다. 특히, A.D. 70년 성전 파괴는 예루살렘이 더 이상 교회의 중심이 될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고 강조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사건을 '메시아를 살해한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갈등 예루살렘은 옛 언약을 상징하는 장소로, 새 언약을 담기엔 부적합했다. 스데반의 설교에서 나타난 강력한 반-성전적 주제는, 가시적 성전이 아닌 영적·천상적 성전으로의 전환을 강조했다. 예루살렘 교회는 오순절 사건으로 시작됐지만, 스데반의 순교 이후 대대적인 박해로 인해 교인들은 흩어졌으며, 이로 인해 교회의 중심도 자연스럽게 이동하게 됐다. 예루살렘 교회의 소멸과 그 영향력 예루살렘 교회는 A.D. 43/44년경 또 한 번의 박해를 겪었고, 이후 사도행전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언급을 줄여간다. 몇몇 교부들의 저술에 따르면, 1차 유대전쟁 이후 예루살렘 교회는 데카폴리스로 피신했으며, 2차 유대전쟁 이후 예루살렘에 유대인 출입이 금지되면서 교회도 소멸돼 갔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다른 지역 교회들에 신학적·목회적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미쳤다. 조 교수의 연구는 초기 기독교의 역사적·신학적 전환을 재조명하며, 예루살렘 교회의 상징적 의미와 그 한계를 명확히 드러냈다.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김효미 기자 | 중세와 근대를 잇는 중요한 연결고리로 평가받는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고대 로마 문학과 인문주의 사상을 부활시키며 르네상스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의 문학적 유산은 당시 인문주의 태동의 계기가 되었으며,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옮겨가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페트라르카는 로마의 고대 영광을 기리며 새로운 문화적 흐름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르네상스의 문을 연 페트라르카 _ 고대 라틴어 문헌 발굴과 인문주의 태동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1304~1374)는 고대 로마의 라틴어 문서를 발굴하고 번역함으로써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의 학문은 신 중심의 스콜라 신학에 지배되고 있었으나, 페트라르카는 고대 문헌을 통해 인간 중심 사상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의 라틴어 연구는 새로운 학문적 욕구를 불러일으켰으며, 이를 통해 인문주의의 태동이 이루어졌다. 특히 키케로와 베르길리우스의 고전을 탐구하며, 인간 본연의 가치를 되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페트라르카의 사랑, 로르_단테의 베아트리체에 비견되는 연모의 대상, 로르 페트라르카는 아비뇽에서 교황청에 일하면서, 한 교회에서 만난 로르(Laure)라는 여인과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인해 평생을 사랑의 열병 속에 보냈다. 비록 그녀는 유부녀였고 그와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로르는 그의 마음속에서 영원한 구원의 여인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이상화한 것처럼, 페트라르카도 로르를 자신의 문학적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는 그녀를 추억하며 수많은 서정시를 썼고, 그중 대표작 칸초니에레는 유럽 시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페트라르카는 그녀의 죽음 이후에도 그녀를 동정녀 마리아처럼 이상화했으며, 그녀를 향한 사랑이 그가 문학가로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과거 로마의 영광을 기리며_위대한 로마 장군 스키피오에 대한 찬양, 서사시 ‘아프리카’ 페트라르카는 로마를 방문하면서 과거의 찬란했던 로마 제국의 영광을 떠올렸다. 당시 이탈리아는 여러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있었고, 로마의 위대함은 이미 쇠락한 상태였다. 그는 로마를 구한 위대한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떠올리며 그를 찬양하는 서사시 아프리카를 지었다. 이 작품을 통해 로마는 일시적으로나마 잃었던 자존심을 회복했고, 로마시의회는 페트라르카에게 계관 시인의 명예를 수여했다. 이는 페트라르카가 고대 로마 문화를 부활시키고자 한 열망의 결과물이었다. 중세와 근대 사이의 인물_라틴어의 고집과 인간 중심 사상의 출현 페트라르카는 고대 로마의 라틴어를 신성한 언어로 여기며 고집했다. 그는 단테가 신곡을 이탈리아 방언으로 기록한 것과 달리, 라틴어 문학에 천착했다. 당시 프랑스어, 히스파니아어, 이탈리아어로 분화된 언어들 속에서 페트라르카는 오직 고전 라틴어만이 인간 본연의 가치를 복원할 수 있는 열쇠라고 믿었다. 그의 문학은 단순한 언어적 고집을 넘어 인류가 고전으로 돌아가야만 인간의 인간다움을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스토아 철학을 존중하는 그의 사상에서 기인한 것이며, 인간의 자유의지로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철학적 주장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중세를 닫고 근대를 연 자_페트라르카, 중세의 종말을 고하고 근대를 연 인물로 평가받다 페트라르카는 중세 시대를 끝내고 근대를 연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어거스틴 이후 모든 것이 신에 의지하던 유럽 사상에서 벗어나 인간의 자유의지와 이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어거스틴이 신플라톤주의를 통해 신 중심의 사상을 정립했던 것과 달리, 페트라르카는 고대 로마의 인문학, 특히 키케로의 사상에 심취했다. 그는 인간 스스로가 고전에서 배우고 이를 통해 행복과 지혜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 사상은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 운동의 토대가 되었다. 페트라르카는 그의 문학적 유산과 사상으로 후대 예술가들과 철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서정시와 인문학적 연구는 근대 유럽 문화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특히 그가 남긴 소네트 형식의 시는 세익스피어를 비롯한 많은 후대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페트라르카는 단순히 르네상스의 아버지로 불릴 뿐만 아니라, 중세의 문을 닫고 근대의 문을 연 사상가이자 문학가로서 유럽 문학사와 사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가 주장한 인간의 자유의지와 고전적 가치의 회복은 이후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 정신을 이끄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김효미 기자 |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이 소장 중인 '대한민국임시정부 성립 축하문'과 '선언서'가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두 문서는 3.1운동 직후 임시정부 수립과 독립운동의 전개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독립운동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임시정부 성립 축하문과 선언서,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 숭실대학교(총장 장범식)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 중인 ‘대한민국임시정부 성립 축하문’과 ‘선언서’가 지난 12일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공식 지정됐다. 이 문서는 1919년 10월 31일 대한 민족대표 30인이 발행한 활판 인쇄 전단으로, 임시정부 수립과 독립운동 전개 양상을 담고 있어 귀중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임시정부 성립 기념, 국민의 독립 의지 담겨 ‘대한민국임시정부 성립 축하문’은 1919년 임시정부 출범을 기념해 이승만을 대통령,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는 통일 내각의 성립을 알렸다. 이 문서는 "10년의 노예생활을 벗어나 오늘에 다시 독립대한의 국민이 되었도다"라는 구절로 독립과 자유에 대한 강한 의지를 천명하고 있으며, 국민의 결의와 독립에 대한 열망을 드러낸다. 특히 “이천만 자유민아! 일어나 자유의 전쟁을 벌일지어다”라는 구절을 통해 국민들에게 지속적인 독립투쟁을 촉구하고 있다. 독립운동 방향을 제시한 선언서 1919년 10월 31일 중국 상해에서 발행된 ‘선언서’는 3.1운동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고 민족의 단결을 호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선언서는 일제의 잔학한 통치를 고발하고, 3.1운동 이후 일제의 통치 방식 변화를 반박하며 우리 민족의 완전한 독립 요구를 명확히 선언했다. 국한문 혼용체로 작성된 선언서는 비폭력과 질서 있는 독립운동을 강조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국민들에게 자위행동 시에도 약자를 보호할 것을 촉구하는 공약 3장이 포함돼 있다. 역사적 가치 재조명과 보존 노력 이 문서는 오랫동안 문헌으로만 존재가 알려졌으나, 1967년 김양선 교수가 숭실대에 기증하며 유일한 실물 전단이 공개됐다.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은 이번 국가등록문화유산 지정이 두 문서의 역사적 중요성을 알리고 보존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며, 유물 보존과 관리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독립운동의 귀중한 역사를 담은 이 문서는 앞으로도 많은 국민이 그 가치를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공개될 예정이다.